여행·취미

청량산, 도산서원, 이육사 문학관, 부석사..

조약돌의꿈 2009. 1. 24. 08:40

 청량산에서.. 저멀리 등뒤로 보이는 사찰이 꽃술같은 청량사..2006.4.1
산수화를 자아내 듯한 경북 봉화군 청량산, 도산서원, 부석사등...
1박2일 여행(2006.4.2-4.3)
반려자와 두자매... 셋이
 

향기차 한잔 드세요..
첫날: 2006.4.2(일)오전 7시
 서울에서 출발-4시간 소요 청량산입구 도착
- 해발 870m 자소봉까지 등반,(왕복 4시간소요)  하산길에 
청량사 관람후 매표소 안쪽에 위치한 숙소지정, 여정 풀다
둘쨋날: 아침식사후 8시 30분 출발 도산서원 도착
(30분소요)-도산서원에서 2km(10분소요)위치의 퇴계종택
-또 10분 거리의 이육사 문학관(왕모산 가는 길목)
-1시간 소요로 영주 부석사-4시30분에 서울로 출발 7시30분착.
월요일 평일이어서 막힘없이 계속 달려온 서울 서울 서울...

청량산 청량산의 여러  풍경... 청량산은 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남면리, 명호면 북곡리와 안동시 예안면 경계에 있는 산. 높이 870m로, 태백산맥의 줄기인 중앙산맥에 솟아 있다. 산 아래로 낙동강이 흐르고 산세가 수려하여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불렸다. 1982년 8월 봉화군과 안동군 일대 48.76㎢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경상북도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최고봉인 장인봉을 비롯하여 외장인봉·선학봉·자란봉·자소봉·탁필봉· 연적봉·연화봉·향로봉·경일봉·금탑봉·축융봉 등 12봉우리(육육봉)가 연꽃잎처럼 청량사를 둘러싸고 있으며, 봉우리마다 어풍대·밀성대· 풍형대·학소대·금가대·원효대·반야대·만월대·자비대·청풍대·송풍대· 의상대 등의 대(臺)가 있다. 산속에는 신선이 내려와서 바둑을 두었다는 신선대, 선녀가 유희를 즐겼다는 선녀봉, 최치원이 마시고 정신이 맑아졌다는 총명수와 감로수 등의 약수가 있으며, 27개의 사찰과 암자 터가 있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리보전이 사찰내 위쪽에 위치해 있다. 유리보전 유리보전은 약사여래를 모시는 법당으로 약사전이라고도 한다. 늘 바람이 세찬 산골짜기의 한쪽에 나즈막하게 지어졌는데, 법당 앞이 절벽이라 마당이 좁은 편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건물의 대들보 밑에 사이기둥을 세워 후불벽을 설치한 것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특징으로 중요하게 평가 되고 있다. 조선(朝鮮) 후기적(後期的)인 특징을 보여 준다. 유리보전에 모셔져있는 약사여래불은 특이하게도 종이를 녹여 만든 지불(紙佛)이다,유리보전 현판글씨는 공민왕 친필이다. 청량사는 전설에 의하면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3년(663)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고찰이라 한다. 기록에 의하면 이 청량산(淸凉山)에는 연대사(蓮臺寺)라는 사찰(寺刹)을 중심으로 대소(大小) 26개의 암자(庵子)가 있어서 당시 신라불교(新羅佛敎)의 요람(搖籃)을 형성(形成)하였다 한다. 이곳엔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리보전(내청량사:경북유형문화재 47), 신라시대에 창건한 외청량사(응진전), 최치원의 유적지인 고운대와 독서당,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은신한 오마대(五馬臺)와 공민왕당(恭愍王堂), 공민왕이 쌓았다는 청량산성, 김생이 글씨를 공부하던 김생굴, 퇴계 이황이 수도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한 오산당(청량정사) 등 역사적 유적지도 많다. 응진전 이미지: 인터넷 옮김 응진전은 청량사 부속건물로서 청량사와 같은 연대에 창건되었고 원효대사가 수도를 위해 머물렀던 곳이다. 응진전 뒤로는 거대한 금탑봉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아래로는 천길 낭떠러지 바위가 마치 9층으로 이뤄진 금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또한 응진전은 고려말 노국공주가 16나한상을 모시고 기도 정진한 곳으로 응진전 좌측 바위에는 부처님의 발모양을 닮은 불족암과 내청량산의 불수암이 자연의 오묘한 조화를 이룬 불국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그 기묘한 형상에 걸맞게 기도 영험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나한 기도도량이라고 한다. 특히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연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고려말 공민왕은 정략결혼 차원에서 원나라 노국공주와 결혼한다. 공주는 고려인을 자처하며 공민왕을 진심으로 도와 고려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다. 아쉬운 점이라곤 결혼한지 8년이 되도록 아기가 안 생긴다는 것이었다. 왕은 중신들의 간청을 못 이겨 후궁을 얻으나, 이를 두고두고 미안해 했다 한다. 이후 부부는 홍건적의 침입때 개경에서 피난와 석달 정도를 안동에서 지낸다. 공주는 이 기간에 응진전에 와서 기도를 드렸다 하니 기도의 내용은 짐작이 간다. 개경으로 돌아간뒤 공주는 임신을 하나 난산 끝에 숨지고, 이후 공민왕은 마음의 병을 얻어 굴절된 말년을 보냈다는 것이다. 웅진전의 16 나한상 중에는 노국공주를 닮은 것이 있어 지금도 기묘함을 느끼게 한다. 어쨋든 봉화에서는 현재도 공민왕과 공주를 위해 동제를 지내는 곳이 많다 한다. 굽이굽이 맺힌 사연을 듣자니 끝도 없는 것이 청량산이다. 언냐와 필자.. *산행은 청량산 휴게소 아래 입석에서 시작한다. 노송이 우거진 등산로를 따라 오산당과 내청량사를 거쳐 주봉우리인 장인봉 정상에 오르면 낙동강과 청량산 줄기를 내려다볼 수 있다. 하산은 보살봉과 김생굴·외청량사를 지나 다시 입석으로 내려오는 길이 잘 알려진 코스이다. 이밖에 광석나루에서 시작해 내청량사를 지나 정상에 오른 뒤 외청량사를 지나 이름실로 내려오는 코스와, 남면리에서 시작해 외청량사와 김생굴·경일봉을 지나 정상에 오른 뒤 내청량사·오산당을 지나 광석나루터로 내려오는 코스가 있다. 찾아가려면 봉화나 안동시에서 시내버스를 탄다. 승용차로 가려면 영동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제천시로 간 다음 소백산을 넘어 봉화군에 들어서 918번이나 919번 지방도를 타고 갈 수 있다. * 자소봉으로 오르는 등산길엔  3개의 철계단이 있다. 철계단1********철계단2 철계단3 : 자소봉 바로 밑계단 철계단을 오르면  바로 이곳에 자소봉 표지석을 만난다. 봉화읍에서 동남쪽으로 29km, 안동시에서 동북쪽으로 24Km 떨어진 청량산(870m)은 사람들의 손때가 묻을까 두려운 듯 다소곳이 숨어있다. 금탑봉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봉우리 12개,8개의 동굴, 12개의 대와 신라 문무왕 3년(663년) 원효대사가 세운 청량사를 비롯한 절터와 암자, 관창폭포 등 수많은 관광자원을 갖고 있다. 청량산도립공원 표석 뒤로 퇴계의 '청량산가'시비가 있으며, 청량산행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지을 때, 이곳 청량산과 현재의 도산서원 자리를 두고 끝까지 망설였을 만큼 청량산을 사랑하고 아꼈다고 한다. 퇴계 이황은 '청량산가'에서 "청량산6.6봉을 아는 이는 나와 흰 기러기 뿐이며 어부가 알까 하노라"하고 노래했다. 청량산은 퇴계  뿐만 아니라 원효, 의상, 김생, 최치원 등의 명사가 찾아와 수도했던 산이며, 그들의 이야기가 곳곳에 남아 전설처럼 전해온다. 퇴계의 청량산가에 나오는 6.6봉은 주봉인 장인봉을 비롯하여 외장인봉,선학봉,자란봉,자소봉,탁필봉,연적봉,연화봉,향로봉, 경일봉,금탑봉,축융봉 등 12봉우리를 말하며, 모두 바위병풍을 두른 듯이 산 위에 솟아있다. 또 신라 때의 명필 김생이 서도를 닦았다는 김생굴을 포함하여 금강굴, 원효굴, 의상굴, 방야굴, 방장굴, 고운굴, 감생굴 등 8개 굴이 있다. 김생굴 신랑의 명필 김생이 수학했던 수도처로서 이 좁고도 궁벽한 곳에서 무려 10년간을 서도에 정진.. 왕희지에 필적할만한 천하명필이자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특히 김생굴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오는데, 옛날 김생이 이 굴에서 9년 동안 서도를 닦은 후, 스스로 명필이라 자부하고 하산할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한 여인이 나타나 자신도 9년 동안 길쌈을 했으니 솜씨를 겨뤄보자고 한다.   이리하여 컴컴한 어둠 속에서 서로 솜씨를 겨루었는데 길쌈해 놓은 천은 한올 흐트러짐이 없는데 반해 김생의 글씨는 엉망이었다. 이에 김생은 다시 1년을 더 정진한 후 세상에 나와 명필이라 칭송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밖에도 최치원이 글을 읽었다는 독서대를 비롯하여 어풍대,풍혈대 등의 12대가 있고, 최치원이 마시고 정신이 총명해졌다는 총명수와 감로수 등의 약수가 있는데 물맛이 달고 시원하다. 또 역사적 유물로 청량사와 응진전, 오산당, 청량산성 등이 있다.              오산당은 김생굴 앞에 있는데, 퇴계가 문인들과 강론하던 곳에 후학들이 세웠다고 한다. 청량산 남쪽 축융봉에는 옛 산성터가 남아 있는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와 쌓았다고 하는 청량산성이다.     (청량산도립공원 : 02-134, 관광지 코드번호 1431~2)   청량산 매표안의 민박집(당시 유일한 새집) 우측의 흰건물은 음식점을 겸한 폭포슈퍼및 휴게소 054)672-1488, 핸폰:017-526-1488(예약필수) 넓은 뜨락아래엔 도로, 그 건너편은 산을 낀 계곡 계곡의 물소리를 벗삼아 지낸 하룻밤이 好.. 입산통제 : 산불방지를 위하여 매년 11월 15일부터 다음해 5월15일까지 일부 구간의 입산 통제(관리사무소에 문의요망) <길잡이> 1) 중앙고속도로 풍기IC -> 5번 국도 -> 영주시 -> 36번 국도 -> 봉화읍 -> 봉성면 봉성리 ->918번 지방도 -> 35번 국도-> 명호면 북곡리 -> 청량산 도립공원 입구            2) 안동시-> 35번 국도, 27Km -> 도산서원입구 -> 3Km -> 온혜리 -> 11Km -> 청량산입구(북곡) -> 10km -> 도천리, 918번 지방도, 13.5km -> 유곡삼거리, 36번 국도, 5km -> 봉화 현지숙박 : 민박 - 청량산휴게소(672-1447), 청량산식당(673-2560), 그루터기식당(673-5450), 까치소리식당(673-9777), 맛고을식당(673-8845)    정보제공자 : 755-800 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청량산관리사무소 (054-679-6321) 도산서원으로 가다 조선시대: 사적 제170호: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깊숙한 길.. 우측아래엔 낙동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이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로 우리나라 유학의 길을 정립하면서 백운동서원의 운영, 도산서당의 설립으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중종, 명종, 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의 부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도산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보물 제211호)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보물 제210호)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으며, 선조 8년(1575) 국왕에게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서원의 건축물들은 민간인들의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 도산서원 안으로 들어가기전 앞마당에서 바라본 시사단 광경 * 시사단(試士壇) 지방 유형문화재 제33호 강건너 비각은 조선시대 지방 별과를 보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정조대왕께서 퇴계 이황선생의 유덕을 추모하여 216년(1792)에 관원 이 만수를 도산서원에 보내어 임금의 제분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다음날 이곳 송림에서 어제로 과거를 보였는데, 응시자는 7천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인 번암 채제공이 지었다. 안동댐 수몰로 송림은 없어지고 단만이 현 위치에서 지상 10m 높이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과검의 자리를 표해 두고 있다.
도산서원 정문앞에서 만개한 매화꽃을 바라보는 일행의 모습..
도산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이미지에서 보이듯이 정원에 매화나무들로 가득차 있다 퇴계선생은 1542년(중중37)부터 1570년(선조3)까지 28년 동안 매화에 관하여 많은 시를 모아 책으로 엮기도 하였다. 특히 매화를 사랑하여 많은 시를 남겼는데, 퇴계 선생의 매화시는 75제 107수에 달하며, 그 중에 61제 91수가 선생의 매화 시첩에 수록 되어 있다. 퇴계선생은 뜰의 매화를 바라보며 매화와 서로 묻고 화답하는 시를 여러차례 읊고 있다가 달이 밝으면 매화를 바라보며 시를 짓기도 하고 매화가 겨울 추위에 손상되었음을 개탄하는 시를 읊어 제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갈때 매화분을 가져가지 못하여 그리워 하다가 제자가 매화분을 보내주자 그 회상을 시로 읊기도 하였다.(직접 현장에서 옮겨온 글) 사진:도산서당 퇴계선생이 최초에 상주하시던 곳 도산서당 앞뜰에 있는 '정우당' 박정희대통령의 기념식수(금송錦松) '성리학'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퇴계 종택 종목 : 시도기념물 42호 분류 : 생가(지) 수량 : 2,119㎡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68-2 조선 중기 문신이며 대학자인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종가이다. 원래 있던 집은 없어지고 이 건물은 1926∼1929년 사이에 선생의 13대손 하정 공이 옛 가옥의 규모를 따라 새로 지었다. 앞면 6칸·옆면 5칸 규모의 ㅁ자형 집으로 총 34칸으로 이루어졌다. 높은 석축 위에 둥근 기둥과 네모난 기둥을 사용하여 지었으며, 전면에 솟을대문을 갖추었다. 오른쪽에 있는 ‘추월한수정’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정자인데 마루 에는 ‘도학연원방’이라는 현판 이 걸려 있다. *사진:퇴계 종택 옆 넓게 위치한 공원식 학습정원을 둘러보다 잠시 한 숨 돌리며 쉬는 평생동반자의 모습이 편안해 보이지는 않는지요.. 퇴계종택 옆 학습공원에 있는 글들.. 우리말 풀이 한자와 음 이육사문학관 [李陸史文學館]   민족시인 이육사를 기리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설립한 문학관. 설립연도:  2004년 7월 31일 소재지:  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원천리(遠川里) 706(불미골) 1.이육사의 생애 호는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활(活). 1904년 음력 4월 4일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에서 둘째로 출생. 이퇴계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이 시절 선비의 자녀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육사도 다섯살 때 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우는 등 어린시절에는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다. 육사의 할아버지는 보문의숙(寶文義塾)이라는 신식학교를 운영하였다.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 열두 살 이후(1905) 백학서원을 거쳐(19세) 일본에 건너가 일 년 남짓 머물렀던 스무 살(1923) 무렵까지는 한학과 함께 주로 새로운 학문을 익혔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여한다. 6.10만세사건후 1926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형님 및 동생과 함께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같은 해 10월 광주학생사건이 터지자 또 예비 검속 되기도 한다 1931년북경으로 다시 건너간 육사는 이듬해 조선군관학교 국민정부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에 들어가서 두 해 뒤에 조선군관학교 제 1기생으로 졸업한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 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 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비롯하여 《교목(喬木)》《절정(絶頂)》《광야(曠野)》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해방을 1년 남짓 앞둔 이듬해 1944년 1월 16일새벽5시에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무려 열일곱 번이나 옥살이를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지금은 안동시에 육사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고, 1946년 유고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다. 문학관 옆 정원에서 만난 이육사 동상에서 나란히... 시비의 詩, "절정(絶頂)"을 이곳에 다시 옮긴다. 절정(絶頂) 매운 季節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육우당-六友堂 이미지 출처: 오마이뉴스 헐린 육사의 생가 사랑채(좌)와 문학관 뒤편에 복원한 육우당(六友堂) 6형제가 태어나고, 거처했다하여 육우당-六友堂. 원래의 이육사 생가는 현재 청포도 시비가 세워진 자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6년 4월에 안동시 태화동 포도골에 이건 보존되고 있으며 이집에서 애국지사 이원기 선생을 비롯하여 육사,원일,원조, 원창,원홍 6형제분이 태어나셨다하여 당호를 육우당이라 한다. 이육사문학관에 있는 생가는 본뜬 모형 집으로 구조는 "二"자 형태이며 앞쪽은 사랑채로 방 두칸, 중간 마루 한 칸이고 뒤쪽 안채는 반 두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으로 지어졌다. 사랑채의 오른편은 팔작 지붕인 반면 왼편은 맞배지붕이 특이하나 수리 과정에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부석사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1리 148번지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교학을 펴기 위해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 그런데, 신라 화엄종의 도량임에도 불구하고 본전인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셨고, 무량수전 앞에는 안양문을 세웠으니 땅 위에 극락세계를 옮겨 놓은 격이 되었다. "부석사"로 이름하게 됨은 무량수전 서쪽의 큰 바위로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浮石)이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고 한다. 1916년 해체 보수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7년(1358) 적의 병화를 당하여 우왕 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 3년(1377) 조사당이 재건되었다고 적혀 있다. 경내에는 신라유물인 무량수전앞 석등(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등이 있고 무량수전(국보 제18호)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국보제45호),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고려각판(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도유형문화재 제127호), 삼층석탑(도유형문화재 제130호) 등이 있다. 특히,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 건물이다. 조사당 벽화는 목조 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다. 부석사 경내의 모습..         관람을 마치고 내려오는길에 만난 만개한 노란 개나리... 도로안내 : * 중앙고속도로 풍기 IC - 순흥 - 부석사 * 경부(중부)고속도로- 신갈(호법)IC - 영동고속도로 - 남원주IC - 중앙고속도로 - 서제천IC -풍기IC *출처: 영주시청 문화관광과 소수서원 일신재와 직방재 원장,교수들의 집무실로서 양재가 한 동으로 이뤄진 독특한 건물이다. 일신재는 일반교수, 원임들이 쓰던 방으로서 "나날이 새로워 지라"는 뜻으로 "대학"에서 딴 것이며, 건물 우측 직방재는 원장(백운동주)이 쓰던 방으로서 안과 밖을 곧고 바르게 하라는 뜻의 "주역"에서 따온 것이다. 강학당이 동서로 길게 앉아 있는데 비해 이 집은 남북으로 앉아 있다. 가운데에 한 칸짜리 대청이 있꼬 양옆으로 벌어져 온돌방이 있는데, 좁은 툇마루를 앞에 두고 칸칸이 나뉜 한 칸짜리 방들이 매우 아담하다. 집중하여 공부하기에 큰 방이 필요치 않다고 여겼던 옛사람들의 생각을 엿 볼 수 있다. 장서각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順興面) 내죽리(內竹里)에 있는 한국 최초의 서원.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유현(儒賢) 안향(安珦)의 사묘(祠廟)를 세우고 다음 해에 학사(學舍)를 이건(移建)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그 후 1544년 여기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1633년(인조 11)에는 주세붕을 추배(追配)하였다. 1550년(명종 5)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과 《사서오경(四書五經)》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내사(內賜)를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학(私學)이 되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서원 중의 하나로 지금도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원의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이 걸린 강당, 그 뒤에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 동북쪽에는 학구재(學求齋), 동쪽에는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또한 서쪽에는 서고(書庫)와 고려 말에 그려진 이미지 출처: 한국브리태니커 안향의 영정(影幀: 국보 111)과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 보물 485)가 안치된 문성공묘(文成公廟)가 있다. *소수서원은 수회 답사로 서울로 오는 길목에 있어 이번엔 입구에서만 바라 보았다. 1박 2일의 등산과 문화탐방의 여행길.. 산수화같은 아름다운 고장과 선인의 삶에서 향기듬뿍 안고 왔다. 또 찾고 싶은 그곳을 남겨두고 서울로..감사합니다.姬金 印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