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사랑]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공주는 우리 옛 문자인 이두(吏讀)를 완성시킨 설총의 어머니이다. 이두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표기법으로, 이두 덕분에 우리 조상은 한글 창제 이전에 한문이 아닌 우리 문자를 쓸 수 있었다. 설총의 아버지는 결혼을 할 수 없는 신분이었던 승려 원효이다. 승려가 신라 임금의 사위가 되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신라 여인의 사랑에 대한 집념은 당시 사회의 통념을 깨뜨려 버린 것이다. 원효는 파계를 참회하는 과정에서 법성종이라는 종파를 열었으므로 요석공주는 신라시대에 종교와 학문 정립에 산파 역할을 한 사람이다. 사랑은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예를 그녀는 어떻게 해서 보여 주게 된 것일까.
화랑의 길을 걷던 신라의 청년 서당은 서른두 살 되던 해(648년)에 황룡사로 들어가 승려가 된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읜 그로서는 목숨을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남달랐다. 그래서 사냥도 전쟁도 생리에 맞지 않아 괴로워하다가 불교에 심취하여 뒤늦게 머리를 깎은 뒤 이름도 원효로 바꾸게 된다.
원효는 고승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열심히 닦는다. 더 많은 것을 배우려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려다 '해골 속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는 그 길로 불경에 대한 연구를 하여 <화엄경소>라는 책을 쓰고, 부처의 말씀을 담은 중국 책 <금강삼매경>을 다섯 권으로 쉽게 풀어 쓰는 일도 한다. 한문 실력과 불교 경전에 대한 해석력에서 일가를 이룬 원효에 대한 소문이 무열왕의 귀에도 들어간다. '어려운 중국의 불경 서적을 쉽게 풀어 쓸 정도의 실력을 가진 스님이라면 설법도 쉽게 하시겠지.'
무열왕은 원효를 불러 이야기를 들어본 뒤 그의 높은 인품과 실력에 감복하여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면 꼭 원효를 초청했다. 때때로 궁궐로 불러들여 강론도 듣는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요석공주는 원효를 때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때로는 먼발치에서 보게 되면서 날이 갈수록 사모의 정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된다. '저 분은 스님이시다. 평생 결혼하지 않을 결심을 하고 출가하신 저 분을 내가 사모하면 안 되지.' 아무리 다짐을 해도 원효가 불도 닦는 승려가 아니라 학식 높고 말 잘하는 미남자로만 자꾸 생각되고, 그리움이 사무쳐 병이 날 지경이 된다. 공주는 용기를 내어 원효에게 모란꽃과 승려복을 선물한다. 원효는 공주의 마음을 알아차렸지만 가타부타 아무 말을 안 한다. 공주는 고민 끝에 자신의 이런 간절한 연모의 마음을 아버지 무열왕에게 말한다.
“아바마마.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는데, 제 눈에는 나무밖에 보이질 않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좋을 듯하옵니다.”
원효 역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주의 아름다운 모습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승려였고 상대방은 공주였다. 두 사람이 결혼을 원하더라도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원효는 답답한 마음에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부르며 거리를 돌아다닌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려나. 하늘 받칠 기둥을 찍어 내려네.”
사람들은 원효가 거리에서 부르는 이 노래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지만 무열왕은 원효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하하, 마침내 내 자식이 대사의 마음을 움직였구나. 대사도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다니 결혼을 시키지 뭐. 그런데 대사가 내 딸과 결혼하려고 과연 승복까지 벗을까?”
무열왕은 어느 날 신하를 시켜 거리를 돌아다니는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인도해 들이게 한다. 신하는 어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아다니다가 문천교라는 다리를 지나고 있는 원효와 맞닥뜨린다. 그 신하가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던 원효는 신하의 모습이 먼 곳에서 보이자 짐짓 발을 헛디딘 체 문천교 아래 냇물에 풍덩 빠진다. 허우적거리는 원효를 건져낸 신하는 가마에 태워 곧장 대궐이 아닌 요석궁으로 달려간다. 원효의 젖은 옷을 갈아입힌 요석공주는 단 며칠이었지만 꿈 같은 시간을 보낸다. 원효가 공주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은 것은 655년에서 660년, 원효의 나이 39세에서 44세 사이에 일어난 일로 추정된다.
필자 : 이승하님 시인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공주는 우리 옛 문자인 이두(吏讀)를 완성시킨 설총의 어머니이다. 이두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표기법으로, 이두 덕분에 우리 조상은 한글 창제 이전에 한문이 아닌 우리 문자를 쓸 수 있었다. 설총의 아버지는 결혼을 할 수 없는 신분이었던 승려 원효이다. 승려가 신라 임금의 사위가 되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신라 여인의 사랑에 대한 집념은 당시 사회의 통념을 깨뜨려 버린 것이다. 원효는 파계를 참회하는 과정에서 법성종이라는 종파를 열었으므로 요석공주는 신라시대에 종교와 학문 정립에 산파 역할을 한 사람이다. 사랑은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예를 그녀는 어떻게 해서 보여 주게 된 것일까.
화랑의 길을 걷던 신라의 청년 서당은 서른두 살 되던 해(648년)에 황룡사로 들어가 승려가 된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읜 그로서는 목숨을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남달랐다. 그래서 사냥도 전쟁도 생리에 맞지 않아 괴로워하다가 불교에 심취하여 뒤늦게 머리를 깎은 뒤 이름도 원효로 바꾸게 된다.
원효는 고승을 찾아다니며 불도를 열심히 닦는다. 더 많은 것을 배우려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려다 '해골 속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는 그 길로 불경에 대한 연구를 하여 <화엄경소>라는 책을 쓰고, 부처의 말씀을 담은 중국 책 <금강삼매경>을 다섯 권으로 쉽게 풀어 쓰는 일도 한다. 한문 실력과 불교 경전에 대한 해석력에서 일가를 이룬 원효에 대한 소문이 무열왕의 귀에도 들어간다. '어려운 중국의 불경 서적을 쉽게 풀어 쓸 정도의 실력을 가진 스님이라면 설법도 쉽게 하시겠지.'
무열왕은 원효를 불러 이야기를 들어본 뒤 그의 높은 인품과 실력에 감복하여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면 꼭 원효를 초청했다. 때때로 궁궐로 불러들여 강론도 듣는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요석공주는 원효를 때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때로는 먼발치에서 보게 되면서 날이 갈수록 사모의 정을 더욱 크게 느끼게 된다. '저 분은 스님이시다. 평생 결혼하지 않을 결심을 하고 출가하신 저 분을 내가 사모하면 안 되지.' 아무리 다짐을 해도 원효가 불도 닦는 승려가 아니라 학식 높고 말 잘하는 미남자로만 자꾸 생각되고, 그리움이 사무쳐 병이 날 지경이 된다. 공주는 용기를 내어 원효에게 모란꽃과 승려복을 선물한다. 원효는 공주의 마음을 알아차렸지만 가타부타 아무 말을 안 한다. 공주는 고민 끝에 자신의 이런 간절한 연모의 마음을 아버지 무열왕에게 말한다.
“아바마마.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는데, 제 눈에는 나무밖에 보이질 않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좋을 듯하옵니다.”
원효 역시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주의 아름다운 모습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승려였고 상대방은 공주였다. 두 사람이 결혼을 원하더라도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원효는 답답한 마음에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부르며 거리를 돌아다닌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주려나. 하늘 받칠 기둥을 찍어 내려네.”
사람들은 원효가 거리에서 부르는 이 노래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지만 무열왕은 원효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하하, 마침내 내 자식이 대사의 마음을 움직였구나. 대사도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다니 결혼을 시키지 뭐. 그런데 대사가 내 딸과 결혼하려고 과연 승복까지 벗을까?”
무열왕은 어느 날 신하를 시켜 거리를 돌아다니는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인도해 들이게 한다. 신하는 어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아다니다가 문천교라는 다리를 지나고 있는 원효와 맞닥뜨린다. 그 신하가 자신을 찾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던 원효는 신하의 모습이 먼 곳에서 보이자 짐짓 발을 헛디딘 체 문천교 아래 냇물에 풍덩 빠진다. 허우적거리는 원효를 건져낸 신하는 가마에 태워 곧장 대궐이 아닌 요석궁으로 달려간다. 원효의 젖은 옷을 갈아입힌 요석공주는 단 며칠이었지만 꿈 같은 시간을 보낸다. 원효가 공주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은 것은 655년에서 660년, 원효의 나이 39세에서 44세 사이에 일어난 일로 추정된다.
필자 : 이승하님 시인
출처 : 월간《좋은생각》
'이런저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집안에 두면 좋지 않은 35가지 - 집안의 위치를 바꿔보자. (0) | 2009.05.15 |
---|---|
은근히 까다롭다! 채소·과일류 손질법 & 보관법 (0) | 2009.05.13 |
긴 글 빨리 복사하는 방법 (0) | 2009.05.09 |
이것만은 밝힐 수 없다! (0) | 2009.05.08 |
웹페이지 로딩빠르게하기 (0) | 2009.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