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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에 나는 미친다

조약돌의꿈 2009. 5. 16. 07:18

사랑하기에 나는 미친다
이중섭과 야마모토 마사코


보고 싶은 사람을 오래 못 보게 되면 차츰 잊혀질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보고 싶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두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미쳐 버린 화가가 있다.

이중섭, 그가 간 지도 어언 43년. 천재화가의 불우했던 생은 그가 남긴 많은 그림에 더욱 깊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어 나는 지난해 늦가을, 경복궁 앞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이중섭 회고전을 보면서 내내 마음이 아팠다.

평안남도 평원의 부유한 농가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중섭은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들어간 뒤 예일대학 미술과 수석졸업자 임용련 선생으로부터 감화를 받아 화가의 길을 가게 된다.

그는 20대 초반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제국미술학교에 들어갔으나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문화학원 유화과로 옮겨 그림 공부에 몰두한다. 문화학원의 후배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는 일본 제1의 재벌 미쓰이[三井]물산의 자회사인 일본창고 주식회사 사장의 딸. 두 사람은 국적도 달랐지만 신분도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러나 마사코는 한국 유학생 이중섭을 깊이 사랑하여 프랑스 유학의 꿈까지 접는다. 중섭은 결혼을 약속하긴 했지만 졸업 후 일본에서 직장을 구할 형편이 못 되어 혼자서 귀국한다. 마사코 가족의 결혼 반대는 당연한 일. 일본인 여자와 한국인 남자의 결혼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던 당시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온갖 욕설과 손가락질을 감내하기로 한다.

사랑에 목숨을 건 당찬 여인 마사코. 홀몸으로 바다를 건너 원산까지 찾아온 그녀와 1945년 5월 결혼식을 올린 이중섭은 아내에게 이남덕이라는 한국 이름을 붙여준다. 남쪽(일본)에서 얻은 여자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었다. 대다수 한국인이 창씨개명을 하던 시절에 일본인이 한국인 이름으로 개명했으니 참으로 특이한 경우였다. 마사코는 중섭만을 믿고 현해탄을 건너오긴 했지만 한국은 말도 다르고 풍습과 음식 맛도 달랐다. 이중섭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미쳐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상으로 생을 마감한 것은 이중섭이었다. 왜 이중섭은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40년 5개월을 일기로 생을 마감한 것일까.

해방이 되고 얼마 뒤 북한은 공산치하가 되었고, 화가와 그의 아내의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1950년 11월 조카까지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 범일동 피난민 창고 생활, 제주도로 가 해초와 게로 연명, 부산으로 다시 가 산동네 단칸방 생활, 유엔 군부대의 부두노동자 생활로 이어진 이중섭의 생활고는 너무 심해 도저히 네 식구를 거둬 먹일 수가 없었다. 한국에 온 지 7년 7개월 만인 1952년 12월, 마사코는 마침내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의 친정으로 돌아간다. 그 무렵 조카 영진도 군에 입대하여 중섭은 홀로 남게 된다. 이때부터 이중섭의 예술혼은 더욱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되지만 생활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심리적으로도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아무리 열심히 그림을 그려도 일본으로 돈 한 푼 부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림은 온통 소, 닭, 까마귀, 아이들, 아이들, 아이들…. 피눈물로 그린 그림들이었다.

다음해 겨울 이중섭은 친구들이 여비와 해운공사 선원증을 마련해 주어 일본행 배를 탄다. 사위를 본 장모는 노발대발, 엄청난 모욕을 준다. 금쪽 같은 내 딸을 이렇게 고생시키다니…. 그 분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왔을지 짐작이 간다. 가족과 재회한 기쁨도 잠시, 중섭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일주일 만에 귀국한다.

그때부터 화가는 미치기 시작했으리라. 가족이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아들한테 자전거 사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이중섭은 만나는 사람마다 잘못했다고 백배 사죄하는가 하면 식음을 전폐하는 거식증을 앓아 깡말라간다. 성가병원, 수도육군병원, 청량리뇌병원, 적십자병원 등을 전전하다 화가는 1956년 9월에 숨을 거두었다. 수혈도 거부하고 영양주사도 거부하고 식사도 거부하던 그의 직접적인 사인은 간염과 영양실조였다. 무연고자로 취급되어 사흘이나 방치되어 있던 시신을 친지들이 뒤늦게 알고는 망우리에 갖다 묻었다고 한다.

사흘이 멀다 하고 꿈에서 만난 아내와 자식, 그 하염없는 사랑이 화가 이중섭을 미치게 했고, 사지로 끌고 간 것이었다.


필자 : 이승하님 시인

출처 : 월간《좋은생각》